이달의 책

‘좋아요’는 어떻게 지구를 파괴하는가(기욤 피트롱)

 우리는 휴대전화를 늘 ‘휴대’하고 있습니다. 휴대전화를 휴대한다는 것은 휴대전화가 제공하는 정보들을 수시로 (어쩌면 일 분 일 초도 쉬지 않고) 송·수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친구들과 카카오톡 메시지를 주고받고 인스타그램의 새로운 피드를 확인하고 DM을 주고받습니다. 인스타나 틱톡, 유튜브 채널 등에서 ‘숏츠’ 영상을 보기도 하고요, 좋아하는 세계관에 접속하여 게임을 하기도 합니다.    소비자와 디지털 산업과의 최초(최초일 뿐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유일한)의 만남은 스마트폰 자체일 것이다. 알다시피 스마트폰은 순수함이라는 개념을 전파하는 아름다운 물건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 어떻게 더러울 수 있단 말인가? 물건이 지닌 미학적 완벽함은 직관적으로 오염이라고 하는 것을 밀어낸다.- 「스마트폰의 정점에서」 중에서      우리는 디지털 환경에 있고 그 환경은 우리에게 제공할 정보를 늘 준비하며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것을 편리하게 최첨단화된 기술 정도로만 인식합니다. 이미 우리에겐 너무나 당연한 환경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들은 디지털 기기를 만들기 위해 희귀 금속이 무자비하게 채굴되는 것을 모르고,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늘어난 인터넷 사용량을 벌충하기 위해 바다 밑에 새롭게 케이블이 설치되는 것을 모릅니다.  몰라도 괜찮을지 모릅니다. 적어도 우리 세대에서는요.  디지털 문명은 앞으로도 발전을 거듭할 것입니다. 디지털 문명이 앞으로도 발전한다는 것은 디지털 인프라 또한 지속적으로 팽창되어 지금의 과부하의 상태가 더욱 극단으로 치닫게 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더 많은 데이터와 인터넷 사용량을 필요로 하게 될 테고, 디지털의 환경적 영향은 급격히 증가할 것입니다. 결국 디지털 세계의 팽창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 지구 환경은 피폐하게 만들 것입니다.      이렇듯, 디지털 기술의 홍보에 ‘녹색’, ‘지속 가능’, ‘친환경’ 같은 어휘들이 동원되는 것은 자칫 위험한 환상을 심어줄 수 있다는 우려를 갖게 만든다. 때문에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당하다고 손가락질 받았을 법한 질문을 던지는 활동가, 기업가, 정치인들이 요즘 들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들은 디지털 산업 자체가 녹색(Green IT)이 아닌데 어떻게 녹색 환경 구현에 도움이 되는 디지털 기술(IT for Green)이 가능한지 묻는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사물인터넷(IOT: Internet of Things)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자재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방식으로 생산되는지를 안다면, 아마도 당신은 이 질문이 굉장히 통찰력 있고 똑똑한 질문임을 인정할 것이다.- 「디지털 산업과 생태계: 환상에 지나지 않는 관계」 중에서    ‘지속 가능한’이라는 말은 거의 모든 영역과 분야에 관용적으로 붙게 되는 수식이 돼버렸습니다. 적어도 지금의 디지털 문명은 ‘지속 가능한’ 성질의 것이 아님을 우리가 알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몰랐던, 지금의 디지털 환경에 대한 지식을 확보하고, 그로 인한 문제들을 분명히 인식하고 정말로 지속 가능한 지구를 위한 새로운 실천을 해야 할 때입니다.   * 책을 읽으면 더 재미있는 사실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번 방학 동안에 꼭 읽어봅시다. 특히 환경이나 디지털 공학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는 친구들이라면 꼭.
자세히보기

수학이 생명의 언어라면(김재경)

  한 수학 선생님이 휘리릭 넘겨보고 말았던 책의 제목이 너무 인상적이었습니다. [수학이 생명의 언어라면]이라고 해서 ‘수학’이라는 도구를 활용하여 ‘생명’이라는 거룩한 근원과 미지의 가능성의 영역을 아주 쉽게(‘언어’니까) 전달해주는 책인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수학 선생님께 금방 읽고 돌려드리겠다며 책을 빌렸습니다. 수학 선생님은 아주 천천히 읽으라고 하시더군요. 마치 더이상 책이 필요치 않는 사람처럼요. 아주 천천히 읽으라고.  호기롭게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저는 대체로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도 끝까지 읽었습니다. 수학 선생님은 수학 선생님이라서 이 책을 다 읽는 데 수 초밖에 걸리지 않았지만(정말로 수 초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봤습니다. 휘리릭.) 저에게 수학이란 너무나 어렵고 요원한 학문이라서 1박 2일을 붙잡고 씨름하고 앓고 그런 뒤에야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었습니다.   수학은 수에 관한 학문이지만 때로 수의 범주를 넘어섭니다. 수학은 시간에 관한 것이고 그래서 수학으로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티맵이 안내해주는 도착 예정 시간 또한 미래가 아니겠습니까. 미적분이 바로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제가 한 말이 아닙니다. [수학이 생명의 언어라면]이 가르쳐준 것입니다.  광일고등학교 친구들, 그거 알아요? 과거를 적분하면 현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현재를 미분하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수학은 시간의 총체입니다. 시간은 누적되기도 하지만 휘발되기도 하고 어느 지점에서 증폭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밤이라는 시간을 볼 수 없지만 언젠가 보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보았던 건 어둠 너머의 진짜 시간, 밤이었습니다. 우리는 수학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걸 결국 못한다고 하더라도 한 번쯤 이 책을 읽어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한 것은 첫째, 문제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 둘째는 수학적 접근의 필요성을 깨닫는 것(219쪽)이라고 하더군요. 문제의 존재라니! 너무나 위대한 발견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지필고사에서나 모의고사에서, 그리고 이번 대수능에서 우리들은 문제의 존재를 인식하게 될 겁니다. 우리가 풀었던 무수한 문제들은 존재로 서서 현존재의 ‘우리’와 만나게 됩니다. 존재로서 부끄럽지 않으려면 그 존재하는 문제들에 예의를 갖추려면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요. ‘수학적 접근’을 통해 고민해봅시다. 이 책을 읽으면 적어도 고민의 ‘방법’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세히보기

침묵을 배우는 시간(코르넬리아 토프)

 말은 해야 맛이라고 했다. 말은 맛있다. 맛있는 말들이 많다. 오랫동안 호감을 갖고 있던 친구에게 무심하게 이런 말을 건네고 싶어진다. 나는 네가 좋다, 오늘은 더 근사해 보인다.  맛있는 말은 멋있는 말이다. 멋진 말들은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지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말들을 매번 할 수 없다. 너무 많이 하면 말의 맛은 사라진다. 말하는 사이, 간격이 필요하다.  ‘침묵을 배우는 시간’에서 가르쳐주는 침묵이 언제나 옳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코르넬리아 토프는 말의 시간과 힘, 그리고 방법에 대해 상당한 지혜를 가르쳐준다. 토프에게 말의 시간과 힘과 방법이란 대개 침묵으로 귀결되는 문제이다. 생각해보자. 얼마나 많은 말들이 쏟아지고 있는가. 우리가 모두 ‘귀담아’ 들을 수 없을 정도이다. 말하는 사람은 또 어떤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도 많다. 토프는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지적한다.      우리가 점점 침묵을 지키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싶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관종’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어떻게든 엄마의 관심을 끌려는 어린아이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싶어 끊임없이 말하고, 메시지를 보내고, SNS에 사진과 글을 올린다.      개인적으로 관종이라는 말을 싫어하지 않는다. 관심을 받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러운 마음이고 관심을 표현하는 일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책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매 순간마다 필요하지 않다.    매 순간 흔들려도 우아하게, 치밀어 오르는 천 가지 말을 꾹 눌러 참을 줄 아는 것. 정말 필요한 때를 기다려 그 말을 전할 줄 알게 되는 것. 좋은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침묵은 말의 깊이를 더한다. 때론 말을 대신할 수 있고 말 이상의 효과를 낼 수 있다. 그것은 메를로 퐁티는 말한 말하지 않음으로 말하는 것의 가치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을 잘 다루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토프는 말을 하려면 침묵보다 더 가치 있는 말을 하라고 당부한다. 말과 침묵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말이 있을 것이다.  봄은 움으로 말한다. 말이 되기 전의 모든 말들은 모두 거기에 있다. 여름은 맹렬한 볕으로 말하고 가을은 무성히 물드는 시간으로, 겨울은 동면 아래 묻힌 울음으로 말한다. 계절마다 부리는 언어가 있고 그 언어들은 말보다는 침묵에 가까운 것들이다.    
자세히보기

인공지능은 나의 읽기-쓰기를 어떻게 바꿀까(김성우)

  이제 인공지능이라는 개념과 그 가능성에 대해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어떤 설명도 듣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우리는 인공지능이라는 말에 대해 익숙해져 있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우리가 인공지능에 대해 알아야 하는 것들은 인공지능의 생산과 효율, 그 외에는 없을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인공지능은 나의 읽기-쓰기를 어떻게 바꿀까』는 인공지능의 효율 이상의 가치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대상(인공지능)에 대한 이해도 여전히 필요하지만 그 대상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인간이 살아갈 삶과 미래에서 어떤 관계를 지향하게 되는지 방향성을 모색한다. 개  인적으로는 챗GPT를 능숙하게 다루는 데 어려움이 있다. 그 어려움이 챗GPT 자체의 한계인지 키워드를 선별하여 입력하는 나의 한계인지 잘 모르겠지만 만약 전자의 이유라면 그 한계가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챗GPT가 생성한 불완전한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나름대로의 의미를 더해 보다 완전한 내용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지금 현재 가장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공존의 방식이 아닐까.   사실 챗GPT는 인공지능이라고 말하는 것의 일부일 뿐이다. 인공지능 기반의 모든 시스템은 인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학습하고 더 빠른 속도로 이해하며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해나갈 것이다. 그래서 더욱 인간의 능력과 챗GPT로 대표화된 인공지능의 기능을 비교·평가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챗GPT의 기능은 지식과 정보를 동원하는 일에 편중돼 있고 그것이 재구성되는 과정에서 동어 반복의 문제가 심각한 편이다. 지식과 정보의 나열만으로는 의미 있는 글이라고 할 수 없다. 그 한계를 명확히 이해하고 인간으로서 갖고 있는 글쓰기(문제해결)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인공지능 시대에서 인간이 정립해야 하는 윤리이기도 하다.   이 책이 안내하는 깨달음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글쓴이는 인공지능 기술로써 아주 훌륭한 텍스트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들의 읽기 자체가 만들어내는 가치는 확고하며 그것은 인공지능 기술로 근접할 수 없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하고 있다. 읽고 발견하는 것의 가치, 깨닫고 도달하는 어떤 지경에서 얻게 되는 다양한 감정들은 인공지능이 생성해준 건조한 텍스트의 맥락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읽기와 쓰기 과정에서 앞으로 새롭게 발견되는 것들이다. 
자세히보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김상욱)

  김수영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며>에서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난 얼마큼 작으냐”라고 자문한다. 옹졸하고 사소한 데 집착하고 애를 쓰는 김수영이 스스로의 모습을 반성하는 대목이다.  비로소 자기자신의 ‘작음’을 깨달은 자는 그래도 지금보다 ‘큰’ 인간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 여러분들도 그런 존재들이다. 지금보다 훨씬 더 큰 사람들이 될 것이다. 하지만 좀 다른 크기에 대해 말해보자. 우리는 우주 이상으로 커질 수 있는 존재들이지만 물리적으로는 한계가 있다. 우리의 물리적 신체를 누이기엔 단 한 평의 공간이면 충분하다.   김수영의 깨달음을 다시 인용해도 좋겠다. “우주여, 나는 얼마나 작은가.”  무등산에 올라 광주 시내를 바라보면 아파트 한 층 한 층이 굉장히 작게 느껴진다. 그 작디작은 공간에서 네다섯의 식구들이 모여 산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을 읽어보면 우리의 ‘작음’이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지구에서 태양까지 100Km의 속도로 달린다고 하면 태양까지 도착하는 데 170년이 걸린다고 한다. 태양계 바깥에 있는 별 중에서 지구와 가장 가까운 별인 ‘알파센타우리’는 똑같은 속도로 5,000만 년을 가야 한다고 한다. 그 정도가 ‘가장 가깝다’니!!  더 재미있는 건 전화통화의 예였다. 알파센터우리에 사는 친구와 전화통화를 한다고 가정했을 때, 밥 먹었어?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듣기 위해서는 무려 8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밥 먹었어? 라고 물어놓고 무려 8,760끼니를 먹은 뒤에야 응, 먹었어, 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광활하다. 넓다는 말이 의미 없을 정도이다. 헤아릴 수 없이 넓으면 우리는 그 ‘넓음’을 믿지 않거나 아예 생각하지 않게 된다. 우리가 지금 눈앞에 놓여있는 사소한 일에 매달리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태양계를 인간 한 명에 비유한다면, 은하는 지금의 인구가 모여 있는 대한민국이라 할 수 있고, 그것을 실제 크기로 환산하면 원자핵 정도의 크기라고 한다. 원자핵의 지름은 원자의 10만분의 1이다. 그렇다면 우주라는 공간을 이해하는 게 정말 더 어려워진다. 여기서 드는 의문 한가지. 그럼 이 책을 왜 읽어야 하지?  우주의 모든 것은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한다. 우주의 시공간을 이해하는 것은 우주를 이해하고 기술하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우주를 기술하는 데 동원되는 이론 중 지금까지 유효한 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이미 배웠거나 앞으로 배워나갈 가능성이 큰 물리적 이론이 이 책에 담겨 있다. 그러나 과학 이야기만 담겨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책의 제목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을 미리 읽어보자. 하늘과 바람과 별이, 인간으로 연결된다. 원자가 인간의 본질이라고 규정된다면 반대하는 철학자가 있을 수 있지만 원자가 우리의 아주 중요한 입자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인간에게는 인간의 ‘입장’이 있고 어떤 입장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을 헤아리든, 우리가 우주의 일부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과학과 사회, 과학과 인간, 과학과 철학, 윤리 등 과학이 경계를 두지 않고 다른 영역과 만나고 그것과의 융합을 꾀하고 있는 책이므로 어떤 진로를 염두에 두고 있든 읽어보길 권한다.
자세히보기

새파란 돌봄(조기현)

‘돌봄’은 본래 개인과 개인 간 사적 관계(보통 고용 관계의 계약을 통한), 또는 가족 관계 내에서만 이뤄지는 행위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현재 돌봄은 사적, 친족적 관계 내에서만 행해지는 게 아니라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제도화되어 있다. 돌봄을 받는, 이른바 돌봄의 수혜자가 있다면 돌봄의 제공자가 있다, 돌봄을 받을 권리는 사회적 권리이지만 돌봄이라는 것은 그 수혜자들에게 초점이 맞춰지는 게 아니라 돌봄을 제공하는 돌봄 제공자에게 맞춰진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는 ‘돌봄을 받는 사람들’이 아닌 ‘돌봄을 주는 사람들’이 더 중요하게 다뤄진다.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들(기관)의 선의와 선행은 정갈하게 포장되어 미디어에 노출되는 것이 단적으로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돌봄을 받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왜 돌봄을 받아야 하는지, 돌봄 이후 그들의 생존권은 어떻게 존속될 수 있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돌봄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시의적절한 돌봄이 제공되는 데 있지만 최종적으로는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을 이 사회가 외면하지 않고 함께해주고 있다는 연대 의지를 주는 데 있다. 그리하여 그들 스스로 돌봄 이후의 삶을 모색할 수 있는 희망과 의지를 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돌봄의 수혜자는 여전히 수동적 존재이다. 돌봄의 수혜자는 수동적 존재이고 돌봄의 제공자는 능동적 존재로 여겨지고 그 역할에 대한 인식은 고착화된다. 그리하여 역할 주체에 대한 편견이 발생하는 것이다. 돌봄의 문제에 관한 대토론이나 사적 담화에서는 돌봄의 제공자의 입장과 상황에서 돌봄에 관한 담론이 출발한다. 돌봄의 제공자의 입장과 상황에서 그들의 시혜의식이 강조되고 돌봄 수혜자들의 열악한 삶과 형편은 그저 ‘힘들다’, ‘빈곤하다’ 정도로 보편화된다. 그것은 불평등이다. 돌봄 수혜자들만 ‘받는’ 게 아니다. 돌봄 제공자들도 돌봄의 수혜자들로부터 받는 것이 분명히 있다. 과연 그들이 무엇을 받는지, 진정한 돌봄이란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 이 책을 읽고 각자의 생각을 정리해보길 바란다. 특히 의료, 간호 분야, 사회, 교육, 복지 분야 등을 염두에 두고 있는 학생들은 꼭 읽어보길 권한다.
자세히보기

영혼 다시 쓰기(이언 해킹)

  이언 해킹(Ian Hacking)은 철학자이자 인간과학 분야에서 가히 절대적인 신뢰를 얻었던 이다. 이언 해킹의 인간과학은 과학적이면서도 비과학적인 인간 존재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인간을 범주화할 수 있다는 믿음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보편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범주화되고 다른 범주에 머무는 인간들과 영향을 주고받게 된다. 이언 해킹은 이 과정을 ‘고리 효과’라고 칭하였는데 [영혼 다시 쓰기]는 ‘고리 효과’라는 틀에서 ‘다중인격’을 설명한다.  다중인격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언 해킹은 어느 쪽에도 방점을 찍지 않는다. 다만 그는 다중인격 또한 ‘아동학대자’, 또는 ‘주의력결핍장애자’와 같은 동일한 인간 유형으로서 실증적인 탐구를 하고자 하였다.   이언 해킹은 다중인격자의 어떤 행위를 독립적인 인자에 의해 도출된 것으로 보지 않고 유형화된 범주 집단의 행동으로부터, 또는 개인의 내밀한 자아(들)로부터 추동된 것이고 그것을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되고 발현된 행위로 보았다.   재미있는 것은 이와 같은 고리 효과가 인간과 사회 간 맥락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73년, 다중인격 일대기 [시빌]에 의해 다중인격이라는 게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다중인격이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1990년대에 이르러 다중인격을 ‘해리성정체감장애’라고 명명하기 시작하면서 다중인격의 유행이 사그라든 것도 고리 효과의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언 해킹이 바라보는 다중인격 유형의 인간들을 다시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지 이 책을 읽으면서 고민하게 될 것이다. 책을 읽게 될 자의 몫이겠지만 광일고등학교 친구들은 이언 해킹의 탐구 과정과 방법론에 주목하기를 바란다. 이언 해킹은 과학적인 분석으로 충분치 않은 인간 존재의 비과학성을 자신의 철학적 회의를 통해 다시 과학적 문제로 환기시키고자 하였다. 이 책에서 다루는 또다른 문제인 ‘영혼의 과학화’도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이다. 이언 해킹의 관점을 빌려 읽되 나중에는 그 관점을 압도하는 자신만의 시각과 사고를 갖길 바란다.  
자세히보기

물질의 세계(에드 콘웨이)

 인간은 물질인가? 아니다. 보통 인간은 물질이라고 표현되지 않는다. 물질의 물질성이 인간에게는 내재하지 않는다. 한때 철학에서 인간의 의식을 물질로 보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지만 인간의 그 어떤 것도 물질로 규정되지 못했다.  그러나 인간의 몸속으로 물질이 들어오게 되는 경우는 많다. 사고를 당한 뒤 보조기를 착용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인공 와우를 삽입하는 경우도 있다. 치아 교정이나 임플란트를 함으로써 외부의 물질이 인체에 포함되는 경우는 더 흔하다. 인간은 물질이 아니지만 결코 물질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 스마트폰이 없다면 어떨까. 하루이틀 정도의 시간이라면 모를까, 스마트폰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의 삶은 영위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스마트폰은 다양한 물질들로 구성된 하나의 세계이다. 만약 스마트폰을 구성하는 물질이 존재하지 않거나, 발견되지 않았다면 인간과 지금의 이 세계는 어떠했을까, 상상이 되지 않는다. 바닷가 모래밭을 무심코 걸을 때가 있다. 우리는 거기에서 주로 모래밭보다는 바다를 바라본다. (바다에도 물질성이 가득하긴 하지만) 하지만 시선을 거두어 모래밭을 상상해보자. 그 모래에서 비롯된 게 반도체다. 반도체가 인공지능의 시작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래로부터 인공지능의 미래가 시작된 거라면 믿을 수 있는가. 믿음 이전이 상상이라면 내겐 그 상상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골방에 처박혀 시집이나 소설집을 읽는 데 몰두했을 뿐 그 책의 물질성에 대해, 그리고 그 물질성의 근원에 대해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2차전지나 재생에너지의 시작은 리튬이나 구리, 철이었다. 지금의 문명을 가능하게 한 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던 물질들의 도정이었던 것이다.  소금이나 석유는 말할 것도 없다. 인간이 물질은 아니지만 물질을 관장하는 주체로서 세계의 모든 물질성을 탐구해왔고 그리하여 지금의 세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광일고등학교 친구들이 이 책을 읽고 이 세계와 인류의 문명의 역사를 이해하고 앞으로의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는 시각을 얻기를 바란다.
자세히보기

눈부시게 불완전한(일라이 클레어)

 장애를 원했던 사람은 없다. 선천적인 장애도 그렇지만 후천적 장애는 특히 더욱 그렇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느 누군가에게 장애는 발생할 수밖에 없다. 장애는 그 범위를 신체로만 한정했을 때 신체 부위의 어떤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장애는 불완전함의 다른 말이다. 이 불완전함을 의료 시스템은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비장애로의 전환에만 몰두한다. 완전성을 지향하는 사회의 모순은 영화 [오아시스]에서도 드러난다. ‘한공주’가 지하철에서 온전한 몸을 갖게 되는 장면은 역설적으로 완전성을 지향하는 세계의 왜곡된 시선을 보여준다.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다. 대개 멀쩡하지 않고 불편하기만 한 부정적 속성을 애초에 그 당사자의 정체성에 근접한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라이 클레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손상된 나의 뇌세포를 치료할 수 있다고 해도 마다할 것이다. 굳고 경련하는 근육이 없는 나를, 어눌한 발음이 없는 나를 상상할 수가 없다. (…) 장애가 없다면 우리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장애와 더불어 자아를 형성해 온 이에게서 장애를 소거했을 때, 그는 무엇으로 남는가?      충격적인 고백이 아닐 수 없다. 불능의 장애성이 현재 ‘나’라는 존재의 정체성일 수 있다는 것, 그러한 생각 자체가 질문이다. 그동안 우리는 아름답거나 완전한 것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갖고 있었는지 책은 묻는다. 선과 악에 대해,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해, 우리가 나름대로 갖고 있던 질서를 뒤집으며 우리 사회와 인간의 태도에서 진짜 결함을 찾고자 하는 책이다.  
자세히보기

마음의 사회학(김홍중, 문학동네)

    마음은 개인의 영역이다. 이것이 마음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인식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사회에도 마음이 있고,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마음이란 게 있다. 레짐(regime)이다. 사회가 거느리는 마음은 일종의 체제이다. 또는 어떤 제도, 또는 패러다임의 문제이다. 이때의 마음은 ‘나’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나’의 마음은 우리 사회의 어떤 레짐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이상한 말처럼 들린다. ‘나’의 마음이란 게 ‘나’로부터 형성된 게 아니라고 하니까. 이 사회(시대)의 마음이 ‘마음대로’ ‘나’의 마음을 항상 지배하고 있다는 뜻이 되니까.   시대의 마음이라는 게 어디 있어?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고 ‘나’에게도 없는 것 같으니까. 그러나 시대의 마음은 그런 게 아니라, 윤리적 실천으로 도약할 공적 장치와 제도의 개선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이다. ‘나’의 마음이 좀더 커졌으면 하고 바란 적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공적 영역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이었을지 모른다.   이러한 마음으로부터 인간의 존재와 운명, 그리고 이 시대의 윤리성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이다. 인문학이나 사회학 분야에 뜻을 두고 있는 친구라면 읽어볼 만하지만 사실 진로와 상관없이 누구든 읽을 수 있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마음이란 게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이 사회(시대)를 향해 마음의 몸피를 키우며, 우리가 마음을 가진 존재로서 서로 연결돼 있다는 것을 깨닫고 보다 윤리적이고 공적인 사회의 마음을 갖게 되길 바란다.
자세히보기
1 2 3 4 5 6

이메일주소 무단수집 거부

본 웹사이트에 게시된 이메일 주소가 전자우편 수집 프로그램이나 그 밖의 기술적 장치를 이용하여 무단으로 수집되는 것을 거부하며 이를 위반시 정보 통신망법에 의해 형사처벌 됨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